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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공간을 설계하다.

 

 누구나 어렴풋한 유년시절의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학교나 놀이터 혹은 아파트 단지 등 자신이 머물렀던 공간에 대한 정보가 떠오를 것이다. 이처럼 주관적인 경험과 관계된 기억은 우리를 그 장소에 얽매게 한다. 시간과 공간은 별개로 생각할 수 없으며 작가는 무엇보다도 장소성에 초점을 둔다. 기억에 의해 선별된 정보는 내부에 간직되었다가 재생된다. 하지만 완전하지 못한 정보로 인해 과거는 완결된 상태에 이르지 못하고 현재 의식의 흐름과 함께 계속 변화한다. 기억에 의한 공간도 변화한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과거의 장소로 거슬러 올라가 재구성된 그 곳에 다시 기억을 불어넣는다.

 

 기억이 담긴 공간은 과거로 돌아가는 통로가 되며 역으로 그 기억 때문에 특별한 의미를 갖기도 한다. 하지만 과거와 멀어질수록 어느 지점에서는 분명 현실이었을 기억에 대한 확신도 차츰 줄어든다. 결국 꺼져가는 촛불처럼 위태롭게 깜박이더니 등장인물과 사건들은 점차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자신만 홀로 남은 무대는 과거를 떠올리는 유일한 단서이다. 어디까지가 꿈이고 현실인지 구별하기 힘든 불분명한 느낌들은 서로 간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환상만을 남긴다. 작가는 아련한 추억의 감정에 초점을 맞추고 과거 어느 지점에서 존재했을 장소에 대한 의문에서부터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간다.

 기억을 곱씹는 과정에서 시공간이 정제되고 축적되면서 선과 면으로 절제된 모노톤의 공간이 나타난다. 라인테이프로 깔끔하게 처리된 단순화된 패턴은 현실의 자극이 사라지고 구체적인 정보가 떨어져나간 결과이다. 이렇게 선이 만들어낸 면들은 통로, 계단, 벽 등의 내부 구조물로 반복되면서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공간을 만든다. 여기에서 보여지는 중첩되고 순환되는 열린 구조는 보는 이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시선을 끊임없이 움직이게 한다. 또한 캔버스에 이질적인 재료를 붙임으로써 생겨나는 두께감은 질감과 함께 투시도에 의한 공간감을 주는 요소로 활용된다.

 초기 작업은 작가의 사적인 경험을 토대로 2차원 평면에 공간을 만들었다면 후반에는 다른 사람의 감정과 기억을 이끌어 낼 수 있도록 공간을 설계하여 일반적인 공감대를 형성하는데 집중한다. 더 나아가 캔버스는 하나의 입체물이 되어 그 자체가 물질로써 현실의 공간에 존재하게 된다. 다른 크기와 높이로 제작된 수많은 파편화된 기억들은 서로 이어져 하나의 큰 공간을 이룬다. 기억들이 끊어지고 또 연결되기도 하며 망각 속으로 끝없이 사라져 버리기도 하는 것처럼 작가의 공간도 가려지고 이어지고 화면 너머로 끊기기도 한다. 각각의 이미지들은 불완전하게 연결되지만 자연스러운 흐름 안에 놓이며 작가의 그리운 감정을 더듬는다. 이는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넘는 또 다른 차원의 공간 설계를 위한 작가의 새로운 시도이다.

 

 시공간은 한 순간도 고정되지 않은 채 유동적으로 변화한다. 시간이 흐르고 장소가 상실되는 순간부터 우리의 과거는 재구성된다. 작가는 불완전한 기억을 토대로 공간과 공간 사이의 이야기를 엮어가며 작품으로써 실제 존재하는 현실을 만든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화면은 다시 새로운 기억을 자리 잡게 하고 보는 이의 내재된 감정을 자극한다. 또한 선과 색이 응축된 절제된 조형미는 해석이 개입될 수 있는 여지를 주어 더 넓은 의미로 확장된다. 이번 전시는 차원을 초월한, 하지만 낯설지만은 않은 나만의 공간을 탐험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김미향 – 갤러리도스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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