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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부학적 공간과 기억

 

 무엇보다 이지연의 회화가 주는 첫 인상은 그래픽 디자인에 가까운 구성력이다. 화면을 채우고 있는 것은 여러 단면들의 층인데, 기계적인 건축도면을 연상시키지만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초현실적인 공간을 떠올리게 한다. 2003년부터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다룬 건축, 실내, 공간이란 주제는 작가가 일상을 기억하는 방식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으리라 여겨진다. 사람마다 경험을 기억하는 대상과 방식이 다를 터이다. 우선 대상의 경우로는 이미지, 공간, 청각, 후각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미지의 경우는 정지된 것과 움직이는 것으로 세분화 될 수 있으며 청각의 경우는 소음부터 언어적 차이까지 미시적으로 나뉠 수 있다. 후각 역시 다양하게 나뉠 수 있는데 대개는 음식부터 공기와 같이 섬세한 대상으로 연결될 수 있다. 이지연의 경우는 무엇보다 공간적 경험이 자신에게 각인되는 기억의 바탕이 된다. 다음으로 기억을 풀어내는 방식을 살펴보면 무엇보다 스토리텔링을 통한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지연은 경험을 기승전결을 가진 이야기의 방식 대신 건축물의 구조 중 일부를 발췌하는 방식으로 기억을 회화 매체를 통해 재구성한다. 공간과 건축에 대한 섬세함은 작가의 추억으로부터 기인한다. 이지연에게 어릴 적 할머니와 함께 지내던 집에 대한 기억은 현재 작업의 원천이다. 흥미로운 것은 대개 추억이란 되돌아갈 수 없기에 그 시절을 되찾기 위해 감성적인 무드나 표현적 질감 등이 나타나는 경우가 잦은데, 이지연의 회화는 기계적 메커니즘에 입각한 객관성이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개인전 “5월의 일지를 들춰보다 part 4”(2009)는 53개의 화면들이 퍼즐처럼 구성된 회화로 각 화면들에 담긴 공간들은 서로 유사해 보인다. 이 회화 속에 등장한 기하학적 공간들은 마치 한 어린 아이가 자신의 눈높이에서 매우 작은 면적의 공간을 다양한 각도로 경험한 기억을 재현한 것처럼 보인다. 무색무취의 색감, 질감에도 불구하고 53개의 화면은 각기 다른 방향에서 바라본 한 공간일 수 있다는 예측을 하게 만든다. 2011년 개인전 <Recollecting Space>에서는 그리운 기억의 장소를 다시 방문한다. 전작에 비해 색채의 농도가 강해지고 색채 구성의 대립 덕분에 건축적 구조보다는 색채간의 관계가 만드는 그래픽적 추상성이 눈길을 사로 잡는다. 2011년 초까지 이지연의 작업은 할머니와의 기억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게 사실이다. 작가란 어쩔 수 없이 상실의 시공간으로 회귀해 그것을 외연화하면서 되찾으려 하는 과정의 반복이란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2011년 개인전 이후 기억에만 천착하기보다 기억을 지지대로 삼아 초현실적 건축 공간에 대한 유희로 작업의 방향을 확장하기 시작한다. 그간의 작업이 하나의 공간을 다양한 시점으로 변주한 여러 개의 화면들을 구성해 입체주의적 방식을 분석적으로 재해석하고 있다면 신작들은 현실과 초현실이 혼재하는 일종의 미로를 제시하는 경향을 띠기 시작한다.

 

 제한된 화면 안에서 다양한 공간을 모색하는 조형적 실험은 <Exploration of Space>(2012)에 이르러 기억 연작이 지시하던 그리움과 공간과의 관계 설정이 다소 모호하여 관객의 입장에서 쉽사리 회화와 교감할 수 없었던 지점이 보다 명료해지기 시작한다. 다시 말해, 2011년 이후의 작업은 건축 구조의 논리 이전에 회화라는 매체가 드러낼 수 있는 긍정적 의미의 비논리적 공간이 나타나기 시작하자 오히려 관객은 그의 회화를 매개로 상식 밖의 공간을 상상할 수 있는 틈 안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작업을 수용할 수 있는 여지를 발견한다. 이지연은 평면작업 외에도 부조-회화를 지속적으로 진행했는데 청주창작스튜디오 전시에서는 실제 공간으로 입체회화의 구조를 확대한다. 두 층의 전시장 사이를 오가는 좁은 계단 사이에 설치된 기하학적 형태의 막들은 바라볼 수 밖에 없는 회화에서 몸으로 경험하는 회화-설치로 확장되면서 실제 공간 속에 자신의 공간을 삽입시키는 기생-공간(para-site)의 가능성을 시도한다.

 

 해부학적 접근

 원근법의 탄생은 우리의 시각의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알려준다. 내가 어떤 대상을 실제로 바라보는 것과 화면 안에 동일한 대상을 원근법에 의거해 재현하는 것은 서로 다를 수 밖에 없다. 인간의 시각은 늘 움직이는 감각이기에 대상을 고정시키고 그 대상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기 위해서는 원근법이란 논리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입체주의 시각의 탄생은 원근법이 가지고 있는 일원주의에 대한 저항으로부터 시작된다. 원근법은 세계를 재현하는 방식이자 전 인류의 공통규범이라면 입체주의적 시각은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보는 방식’일 것이며 더 나아가 다양한 지각의 잠재력을 우리에게 일깨워주었다. 이지연의 작업은 개인적 경험과 기억을 내러티브가 아닌 사건이 벌어졌던 장소와의 관계로 표출하려 한다. 흥미로운 점은 포트폴리오 상에서 보면 “5월의 일지를들춰보다”(2003)을 제외한 그 외 작업들은 모두 실내만을 포착하고 있다. 도시의 탄생과 해부학적 시각은 서로 교차하는데, 한 예로 상점의 창을 들 수 있다. 근대화가 상업이 활개를 얻고 도시는 과거와 다른 풍경으로 펼쳐진다. 함부로 내부를 볼 수 없던 시대에서 상업의 발달은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 저마다 거대한 투명 유리를 설치하여 내부를 공개한다. 해부학적 시선은 가려짐의 시대에서 공적으로 보여주는 시대로의 이행을 잘 보여준다. 발터 벤야민은 외과의사와 주술사를 사진사와 화가로 비교한다. 그에 따르면 외과의사와 카메라는 현실의 깊이로 침투하지만 주술사와 화가는 약간의 거리를 두면서 신비로움을 남겨 놓는다.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나고 이제 인간의 눈은 사진기의 눈과 흡사하게 연동되는 시대가 되었다. 오늘날 젊은 세대의 화가가 주술사적 시선으로 회화를 보지만은 않는다는 사실은 놀라운 현상이 아닐 것이다. 이지연이 지속적으로 실내 공간이란 소재를 조형적으로 다양하게 변주하고 심지어 입체 작업으로 확장한다는 것은 새로운 도전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만이 가지는 기억-공간-회화 간의 고유한 질문이 무엇인가 물어야 할 때이다. 여기서 나는 해부학적 시선과 인티머시(은밀함, 친밀감, 가장 깊은 내면)과의 관계를 작가에게 제안하고 싶다.

 

 이번 청주에서의 개인전에서 그 가능성을 보여주었듯, 관객이 전시장 내부에서 또 다른 내부로 향하는 통로 혹은 또 다른 내부로 이어지는 미로와 같은 조형적 실험이 좀더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길 바란다. 이제 작가로서 이지연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그리움이란 추상적인 기억을 재구성하기보다는 우리 누구나 알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기억이란 기제와 공간에 관한 경험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질문들을 조형적으로 풀어내어 보는 것이 아닐까? 혹은 과연 외피를 갖고 있는 않는 내부 공간이란 무엇인지도 궁금하다. 현대 건축이 스킨 아키텍처(Skin Architecture) 개념을 강조하면서부터 내적 활동을 위한 공간이 아닌 하나의 도시 조각(Urban Sculpture)으로 나아가는 경향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유추할 수 있을까? 물신주의가 과도하게 팽창하면서 이제 모든 사물은 예술품의 권위를 모방하려 한다. 작품을 소장하듯 가구나 패션을 수집하는 것은 이제 흔한 일이 되어 버렸다. 반면 패스트패션은 중산층 가정의 실내를 유사하게 획일화시킨다. 초자본화 된 시대를 사는 현대인에게 고유한 일상적 경험을 갖기란 쉽지 않은 일이 되어 버린 듯하다. 공간을 헤매고 그 공간 안에서 사유하고 또 공간을 통해 기억을 이끌어내려는 시도는 총체적 사회 현상에 대한 나름의 이해와 함께 살고 있을 때 이지연의 작업이 시적 감응을 증폭시킬 수 있으리라 믿는다.

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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